덕수궁 돈덕전 德壽宮 惇德殿 Dondeokjeon
대한제국의 영빈관’인 덕수궁 돈덕전이 100년 만에 재건돼 문을 열었습니다.
‘돈덕’이란 《서경 (書經)》 〈순전 (舜典)〉에 ‘덕있는 이를 도탑게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惇德允元〕’ 는 글귀에서 따온 말입니다. 돈덕전은 덕수궁 경내 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 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존재하며 돈덕전도 그 중 하나 입니다.
돈덕전의 역사
돈덕전은 처음에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이 관장하던 해관의 한옥 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 경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궁내 주요부 영역과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후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새로운 양관 공사를 시작했으며, 이 새 양관이 바로 돈덕전입니다.
돈덕전의 건축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습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는데요.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 입니다.
그러나 공사의 진척 속도가 많이 더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루었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습니다.
돈덕전의 변천사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습니다.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습니다.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궁궐에 외국인 숙소가 있는 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애당초 외국인과 교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하면 크게 의아할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습니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순종은 이곳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대신 즉조당으로 이어했으며 돈덕전은 신하들과 일본 관리들이 황제를 배알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해 10월에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가 방한했을 때에는 상견례와 회식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고, 11월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1910년에 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습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돈덕전은 방치되었습니다. 그 후 없어졌는데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921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저 때까지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6년에 경성부 시내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돈덕전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철거된 듯 합니다.
이후 1930년대에는 돈덕전 터에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이 세워졌습니다.
돈덕전의 가려진 이야기
순종의 황제 즉위식 장소와 날짜가 각각 두 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1907년(융희 원년) 8월 27일 돈덕전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광무 11년) 7월 19일의 중화전입니다. 그런데 중화전에서 거행한 것은 즉위식이 아니고, 대리청정을 맡은 순종에게 진하(陳賀)하는 예식이었습니다.
당시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게 퇴위 압박을 받고 있어서, 절충안으로 양위 대신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대리청정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저 예식을 치룬 것인데요. 그런데 일제는 이를 슬그머니 즉위식으로 포장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를 기정 사실화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얼결에 순종은 황제에 올랐고 정식 즉위식을 같은 해 8월 27일 돈덕전에서 거행했습니다.
또한 돈덕전은 건물이 얼마나 화려했던지 1908년(융희 2년) 3월 29일에 일본인 목수 마츠우라 신사부로(松浦真三郞)와 타마쇼 테이타로(玉署貞太郞)가 담을 넘어 돈덕전을 보려다가 경찰서로 잡혀가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돈덕전, 100년 만의 재건
구한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재위 1907~1910)의 대관식이 열린 서양식 궁전 건축물로 국내 최초 근대식 외교 영빈관으로 쓰였던 서울 덕수궁 돈덕전이 3년여 동안의 내외부 공사를 마무리하고 공식 개관 했습니다.
옛 돈덕전은 덕수궁의 대표적 양식 건축물로 대중들에게 유명한 석조전보다 이른 1902~1903년 지어졌습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는 칭경예식을 하기 위한 용도였다가 그 뒤 순종의 즉위식과 제국이 열강 사이에서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 활동이 이어졌던 역사적 현장이 됐습니다. 국권침탈 뒤에는 용도를 잃고 방치되었다가 1921년~1926년 철거된 것으로 전해지며 헐어낸 지 100여년 만에 재건한 것입니다.
이번 개관으로 지난해 2022년 11월 건축물 외관의 복원을 마치고 지난 5월 새 현판을 제막한 데 이어 6~8월 마지막 공정인 1~2층 내부 전시공간 구성과 설치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재건한 돈덕전의 온전한 전모가 드러나게 됐습니다.
1층은 고종의 칭경예식 등 대한제국 당시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상설 전시실과 국제행사용 공간으로, 2층은 대한제국을 비롯한 한국 근대외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실과 회의장·공연장 전용이 가능한 아카이브자료실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2층 전시실에서는 초대 주미공사관원 강진희(1851~1919)가 1888년 부임한 직후 미국 현지에서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두 대의 기차를 목격하고 그린 국내 작가 최초의 서구문물 그림인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와 일제강점기에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먹으로 덧칠해 그려 넣은 서울 진관사 소장 태극기(국가보물)의 복제본을 진열 했습니다.
2017년 터 발굴당시 출토한 타일조각들을 재현해 장식한 1층 복도바닥에서는 지하 발굴공간의 유적들도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돈덕전 내부 언론 공개회에서 박상규 덕수궁관리소 학예연구사는 “100년 전 내부 모습을 고증할 자료가 없어서 (실제 모습을 재현하는 대신)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며 “내부 공간을 전시실과 도서실, 문화·예술 행사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붉은 벽돌과 푸른 창틀이 이국적인 ‘돈덕전’은 덕수궁 내의 ‘석조전’과 함께 현재 MZ세대 사이에선 인증샷 명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돈덕전 관람 안내
2023년 9월 26일(화) 오전 9시 이후부터 돈덕전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 위치 : 서울시 중구 세종로 99 덕수궁 (시청역)
-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 9:00 ~ 17:30 (입장마감 17:00)
- 매주 월요일은 덕수궁 휴관
- 관람요금 : 무료 ( 단, 덕수궁 입장권 별도 구입)